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2019년의 봄, 넷플릭스 그리고 정수기.
그 날은 정수기 정기 점검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오늘의 홈트는 자동으로 취소, 영화나 보지 뭐 라고 생각했다. 딱히 정해 둔 영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너무 빡세지 않은 걸로, 그치만 너무 가벼운 것도 싫어. 가입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넷플릭스를 켜고 이리저리 영화 목록을 뒤적이다 '이거면 되겠다' 싶어 선택한 것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었다. 내가 당시 이 영화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퀴어 영화 라는 것, 아카데미를 비롯한 유수 영화제에서 좋은 평을 받았고, 팬덤이 있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미남 배우 아미 해머가 나온 다는 것 정도였다.
영화의 오 분의 일 정도 보았을 때 점검원이 왔다. 나는 그대로 영화를 보고 그 분은 정수기를 매만지면 될 줄 알았는데, '코디'님은 야속하게도 계속 말을 거셨다. 날씨가 너무 좋지 않냐, 왜 집에 계시냐(너가 오셨잖아요!), 호수 공원에 가시라 등등.. 나는 결국 영화를 멈추고 적당히 응대를 하며 그 분이 빨리 가시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날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내 인생이 바뀌었다. 영화는 길지 않았다. 넷플릭스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시에 추천 컨텐츠를 띄우며 야 이제 끝났어, 깨운다. 나는 그렇게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하원 준비를 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바쁜 저녁을 보낸 후 아이를 재웠다. 잠들기 전 자리에 누워 남편과 하루 일을 이야기할 때에도 영화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숨도 자지 못했다.
그 것은 마법이었다. 자꾸만 나를 1983년 여름의 이탈리아 북부 어딘가로 끌고 갔다. 머리를 울리는 쨍한 피아노 선율. 마구 흩어져있는 악보와 책과 고고학 슬라이드. 햇빛, 수영장, 담배, 살구나무와 복숭아. Futile Devices 그리고 Visions of Gideon.. 하루 이틀이면 깨어나겠지 싶었던 그 마법은 일주일, 열흘, 한 달이 되어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잊고 있다가도 문득, 나는 약간의 가슴 통증과 함께 배어나오는 짙은 한숨을 뿜어내며 엘리오를 떠올렸다. 어떤 날은 왈칵, 눈물까지 쏟았다. 아무 것도 보고 싶지도 않고, 먹고 싶지도 않았다. 매일 매일이 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일 포스티노' 처럼 아픈데 계속 아프고 싶어졌다. 홀린 듯이 영화 구매를 하고, 원작 책은 한글판과 원서 모두 사서 읽었다. 아주 질려버릴 때 까지 보고 또 보아야 이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내 감정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지던 때에, 인터넷에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관한 모든 글을 찾아 읽었다. 나와 같은 열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 신기하기도 하고, 실제 영화 촬영지에 다녀온 팬의 후기를 읽으며 미친 듯 부러워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영화와 원작의 결흠, 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들을 읽고 한 동안 많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영화 한 편을 나노 단위로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수 많은 결과물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몇 날 며칠을 할애했다.
아,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새롭고 즐거웠던지.
십 여 년 전의 나는 매일 영화를 보고, 글을 썼다. 영화제도 줄곧 다니고 잡지도 줄기차게 읽고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에 관해서라면 밤을 새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그야말로 '시네필' 이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차츰 열정도 애정도 식고, 블로그는 폐쇄하고 한 때 꿈꾸었던 영화 비평은 오히려 기피하게 되었다. 좋은 영화를 보아도 예전처럼 밤을 새면서 감상글을 작성하지 않았다. 그저 '아 재밌네, 잘 만들었네', 그 뿐. 그러다 어느 순간엔가 그토록 한심해하던 '그냥 가벼운 영화만 보고싶어'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영화제는 커녕, 극장도 가기 싫어했다. 넷플릭스는 커녕 영화는 OCN 으로 보면 충분하다 생각하기도 했다. 나를 알던 모든 사람들이 '쟤는 영화를 좋아해' 하던 시절은 진즉 끝이났고, 슬프게도 그렇게 말하던 사람들마저 더이상 내 곁을 떠난지 오래였다.
엘리오, 올리버, 수프얀 스티븐스, 루카 구아다니노는 그렇게 내 삶에 들어왔다. 내 인생을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 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 이 영화를 보기 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그 해 봄과 여름 내내 자전거를 탔다. 페달을 밟고 땀을 흘리고 바람을 맞으며 온통 초록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정확히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행복감이 찾아와주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이 있었구나,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 해 여름 손님이 다녀간 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 글을 썼다. 감상한 책과 영화에 대해 누구던지가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트북을 샀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 하루가 다시 빛났다. 햇빛을 보면 행복하고, 비가 오면 기뻤다.
내 이름이 다시 불리워졌다.
그리고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질투가 났다. 엘리오, 올리버, 앙드레 아치먼, 모두를 시기한다. 이 질투심이 얼마나 눈물나게 반가운지. 부디 이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기를, 활활 불타지 않더라도 내 가슴 한 쪽에 영원히 머물어 주기를...
If not later, w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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